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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탄생, 유진목

paradise
2021.05.07
7막 / 나에게는 신이 있었다. 신은 수시로 찾아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했습니까?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났고, 긴장한 탓인지 종일 두통이 있었습니다. 몸은 피곤한데 지금은 잠이 오지 않아 괴롭습니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점심에는 수제비를 먹었고,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아 참, 그 집은 언제라도 다시 가 볼 생각입니다. 정말 맛있었거든요.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때 갑자기 햇빛이 쏟아져 눈을 감았습니다. 대답을 이어 가는 동안에는 별것 아닌 일들이 즐겁게 혹은 애틋하게 느껴졌다. 신은 다른 대답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좀 더 특별한 무엇인가를. 그러나 내게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러자면 거짓말을 좀 해야 했는데 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

통영, 유진목

paradise
2021.05.07
이듬해 당신이 떠나며 잘 있으라고 말했다 나는 대답을 몰라서 흙을 한 줌 쥐었다 놓았다 내가 본 당신은 가슴이 아플 때 짓는 표정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얼굴을 어디에 두고 온지 몰라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을 텐데 당신이 떠난 뒤로 여러 번 무서운 생각이 들어 들창 밖을 내다보았다 밤과 낮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알 수 없는 꽃들이 피었다 지고 바람에 실려 미지근한 냄새를 풍기고 그해 겨울 리아스식해안에서 당신과 나는 동백을 던지며 놀았다 우리는 그때 통영에 갔었지요? 죽으면 나에게 돌아오라는 약속을 했지요? 마당에 나가 보니 죽은 지 오래된 개가 바람에 구르고 있더군요 기껏해야 몇 해 더 살겠지 하며 통과한 세월이 당신보다 많아졌다고 적는다 그래도 당신 너무 무서워 말아요 눈먼 자의 한숨처럼 여기는 ..

시항, 유진목

paradise
2021.05.07
새벽에 배가 하나 있을 거야.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배야. 그걸 타고 조타실 바닥에 앉아 있으면 배의 주인이 와서 배를 띄울 거야. 네가 있는 것은 모른 척할 거야. 그건 나하고 얘기가 된 거니까 너는 없는 사람처럼 조타실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된다. 배는 내가 있는 곳에 도착할 거야.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배야. 너는 조타실 바닥에 앉아서 배가 출발하고 도착하길 기다리면 돼. 그러면 거기에 내가 있을 거야. 만약 내가 없다면 중간에 무언가 잘못된 거야. 그래도 괜찮아. 너는 도착할 거고 나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할 거야. 너는 배에서 내리면 돼. 바다가 끝나고 육지가 시작될 거야. 나는 있거나 없겠지만 너의 삶은 계속될 거야. 나는 잘못돼도 너의 삶은 계속될 거야. 두 발로 걸어서 가고 싶은..

피망, 유진목

paradise
2021.05.07
씨앗을 받아 쥐고 묽게 번지는 여름을 본다. 손가락 사이로 우리가 사랑한 계절이 흐르고 있다. 내가 주먹을 쥐면 너는 그것을 감싸고 내가 숨을 쉬면 너는 그것을 마시고 처음과 나중이 초록인 세계에서 피망의 이름으로 눈을 감았다.

로즈와 마리, 유진목

paradise
2021.05.07
로즈와 마리는 하나였는데 어느 날 둘로 나뉘었다. 마리는 그런 줄 모르고 로즈와 하나인 듯 거기에 있었다. 그곳은 바람이 짜고 어느 날은 해가 구름에 완전히 덮이거나 어느 날은 해 말고 다른 것은 없는 날이 비가 올 때는 바다가 검게 그을려 빗물이 닿는 것마다 불같이 놀라곤 하였다. 로즈는 비에 젖어 마리가 짙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마리를 볼 수 있게 된 것인지 둘이 된 것인지 하지만 마리는 로즈를 볼 때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고 마리, 로즈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혼자 죽었다. 나는 네가 어떤 것은 평생 모르길 바라 그러나 살면서 거짓말은 하지 말고 남의 것을 탐하지 말고 무엇보다 품위를 갖고 마리, 죽기 전에 로즈는 생각했다. 네 자신으로 행복하면 좋겠어 마리는 그 후로도 여러 해를 살았다.

국경의 밤, 유진목

paradise
2021.05.07
오랫동안 달리고 있었어 능선부터 밝아 오는 가느다란 길을 한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곧고 구부러진 길을 멀리서 다가오는 두 개의 헤드라이트 저 멀리 점멸하는 붉은 후미등 내가 어디로 가는 중이었는지 너도 아마 알고 있었을 거야 산을 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달려드는 눈발과 잠깐씩 드러나는 길 너를 떠나기로 해서 미안해 후회하지 않은 적은 한순간도 없었어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대로 계속해서 가야 한다고 몇 날 며칠을 달리는 동안에 아름다운 광경을 봤어 너에게 모두 말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까 사랑이 끝나는 순간을 알고 싶었어 내가 국경을 넘었을 때 휴게소에 잠시 멈췄을 때 이른 아침 처음 내린 커피를 마셨을 때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를 찾을 때 지도를 펼치고 내가 있는 곳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