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불멸(反不滅), 김이듬

paradise
2021.02.04



작은 전시관이야. 예전에 너하고 봤던 그 그림들이야. 「카페에서, 르탕부랭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그 작품 생각나니? 반고흐 애인으로 알려진 여자 초상화 말이야. 근데 그 초상화 밑그림으로 다른 여자의 상반신이 그려져 있네. 「포도」에도 「노란 장미가 담긴 잔」에도 다른 못 그린 그림들이 숨겨져 있어. 가난한 화가가 재활용한 캔버스의 밑그림이 훤하게 보이는 거야. 이렇게 회화에 엑스레이를 쐐보면 덧칠하기 전에 그린 그림들이 보인단 말이지. 그가 덮어버린 스케치 감췄다고 믿었던 수많은 물감칠 안간힘 쓴 흔적들이 고스란히 들통 나는 거야.

전시관 앞 기념품 가게 모퉁이에서 엽서에 몇 자 적어 보낸다. 내가 죽거든 내 작품에 엑스레이나 전자현미경을 들이대지 마. 낙서도 만화도 아닌 거 훔쳐본 누드 종이를 불에 그을려 보지 마. 덧칠한 시와 산문들, 눈물이 마르지 않은 종이 위에 쓴 명랑한 노래, 그지없이 한심한 필체나 지웠다가 쓰고 다시 덮어버린 잿빛 모래 위 갈매기 같은 글자를 보지 않길 바라. 이걸 읽으며 넌 키득키득 웃어넘기겠지. 한심한 네 작품을 누가 힘들여 분석하겠냐며 답장을 쓸지도 모르지. 내가 죽거든 다시는 못 살아나게 지켜줘. 내 얘길 하지도 마. 메모든 수첩이든 불태워 줘, 부탁해.


'paradi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후와 밤의 열차, 볼프강 보르헤르트  (0) 2021.04.28
체임버 뮤직, 제임스 조이스  (0) 2021.04.08
감정은 여러 종류의 검정, 구현우  (0) 2020.12.31
빈집, 기형도  (0) 2020.12.01
레몬, 허수경  (0) 2017.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