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d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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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여러 종류의 검정, 구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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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흰 시계탑 아래에서 만났지 정오의 어두움 광장과 민낯 무분별한 화합 그런 것들 건강한 아픔이 있다 행인이 말하는 걸 일행도 아닌 내가 들었다 열두시가 지나서야 겨우 너를 찾았다 언제나 제때 오는 것은 없다 종소리가 멎었으나 아무렴 어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기로 했다 둘이 있어도 둘이 아니어도 다만 하나의 슬픔이었다. 회복에 전념하는 시간이 있었다 시계탑 왼편에서 나아질 때를 기다렸다 사람의 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겠지만 감정은 여러 종류의 검정 보이지 않는 것을 부를 수는 있으니 병일 수밖에 80년대에 태어난 내가 70년대에 만들어진 거리를 걷고 있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볼 수 있는 때가 있었다는 거다 웃고 있는 네가 외로워 보인다고 하면서 너는 더 크게 웃어버리는구나 인간이 언어를 익..

빈집,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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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1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레몬, 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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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6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달의 궁전, 서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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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6
뭇 별은 마치 숱한 전등처럼 빛을 배웅해어쩌면 별은 나를 감시하는 건 아닐까?아니, 아닐거야그래, 내게로부터 너를 탐하는 수렵꾼일 테지이봐, 어서 내 집착의 동굴로 숨어. 나의 아집을 덮고 누워그렇지. 나는 이렇게 너를 지켜줄게. 많은 별과 오색의 구름들과 달무리가 너를 애타게 불러.그들은 너를 실종한 별이라고 이름 붙이지너를 데려가려는 달의 궁전은 대체 어디야?나의 동굴에서 제발 나가지 마 세상의 모든 칠흑을 데려와도 견줄 수 없는 내 어둠에서너는 유일한 빛이 되어 줘. 그렇지, 나의 태양인 그대야 내가 잘못한 거야? 너를 내게로 가두면 안 되는 거야?너는 달의 선녀, 나는 그런 너를 욕심낸 몽롱한 나무꾼 이상하다.나는 너를 지키려 한 것 뿐인데너는 왜 갈수록 빛을 잃어?

Owol - W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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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9
Owol - Why?

들개의 부활, 박은정

paradise
2016.11.20
너는 죽었다 무표정하게,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검은 구멍만을 열어둔 채, 무엇이 두려워서 매일 잠 속에서 보내는 거지? 일 년이 하루처럼 흐르고 하루가 일 년처럼 흐르는 이곳에선 겨울보다 빨리 봄이 오는데, 죽은 자의 마음으로 창을 열어봐 누군가 긴 제문을 읽는 동안 낙엽이 이마 위로 쌓이고 죽은 나무 위로 눈이 내리기도 하였지만, 검게 윤이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너는 벌레처럼 어미의 얼굴에 들러붙어 울음을 구걸한다 네 부패하는 시간을 위해 환기가 필요해 잠든 얼굴이 흘리는 태몽을 견디며, 숨기고 싶던 목숨이라는 말, 넘쳐서 죽어버릴 그런 불멸이라는 말, 너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건 들판의 시간들일 뿐, 앓던 얼굴이 침묵으로 잠들고, 그렇게 어둠 속에서 먼지 쌓인 정물이 되어가는 거, 그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