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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방송, 박정대

paradise
2016.11.10
긴 방파제를 따라 파도가 치지 파도에 밀려 저녁이 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방송을 시작해 당신은 듣고 있을까, 오로지 당신을 위해, 긴긴 말레콘을 따라가며 부서지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방송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면 「찬찬」이라는 음악과 함께 파도치는 말레콘의 풍경이 나오지 그런 말레콘을 따라 오래도록 당신과 함께 걷고 싶었어 아바나의 밤하늘엔 노란색 별들이 떠 있고 우리는 가난한 건물들 사이를 아무 걱정도 없이 걸어가겠지 베로니카, 삶이 가난한 것은 건물들 때문이 아니야 우리는 지금 저녁의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한 잔의 술을 마실 수도 있고 말레콘에 부서지는 파도의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잖아 거리에는 가난한 악사들이 그들의 영혼을 연주하지 선풍기가 없어도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

우주적 우연, 이운진

paradise
2016.11.10
우주를 가로질러 오는 그대가 만약 그라면 나는 지구의 속도로 걸어가겠어 시속 1674km의 걸음걸이에 신발은 자주 낡겠지만 지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건 사람을 믿는 이 별의 아름다운 관습처럼 살고 싶어서였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단단한 국경선인 마음을 넘어 천 년 넘은 기둥처럼 그의 곁에 조용히 뒤꿈치를 내려놓는 일이야 눈부신 밤하늘의 정거장들을 지나 지구라는 플랫폼으로 그가 오면 풀잎이 새에게 호수가 안개에게 바위가 바람에게 했던 긴 애무를 맨발로 해 주겠어 첫 꿈을 깬 그대에게 적막이 필요하다면 돌의 침묵을 녹여 꽃잎 위에 집 한 채를 지어주겠어 그것으로 나의 정처를 삼고 한 사람과 오래오래 살아본 뒤에도 이름을 훼손하지 않겠어 지구에서의 전생을 잊지 않겠어

비의 바깥, 최백규

paradise
2016.11.10
벚꽃의 수동성 비행운은 소리의 탄생 꽃피는 못과 끊어진 오케스트라의 차이 혀의 작은 움직임으로 만들어내는 긴 약속들 거스름돈 받으며 손끝 스치는 순간의 어린 감정 고장 난 라디오의 반복 재생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깨문 다음 나누어 삼키고 너와 함께 비가 오지 않는 곳들로 떠나고 싶었다 너는 멀리서 비의 바깥으로만 손을 내저었다 빗방울의 색깔을 씹은 것 같아 혓바닥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흐트러지는 시야에 우산을 접는 너의 익숙한 손짓 나는 그냥 하늘에서 내리는 물감처럼 웃었다

낭만의 역할, 이제야

paradise
2016.11.10
너의 낭만이 되어줄게 눈에는 하얀 구름을 붙이자 서서히 모든 어둠이 낮이 될 수 있어 시들함과 보들보들함이 만나 상쾌해지는 물감 같은 구름을 노란 손으로 꽉 쥐면 달이 된다는 믿음으로 너의 낭만이 되어줄게 종이꽃이 통통한 줄기와 닿는 오후는 백지 스케치북 한 페이지가 전시회장에 걸리는 황홀함이니까, 무제 같은 제목으로 사라지는 소리가 재회의 약속 같은 계절에 너의 낭만이 되어줄게 낭만 없는 낭만에서도 너의 낭만이 되어줄게

소년을 만드는 방법적 소녀, 황혜경

paradise
2016.11.10
헤어지는 법을 모르는 소년을 찾고 있어 사랑하려고사탕을 빨아 먹는 아이와 사탕을 깨물어 먹는 아이에 대해 나는 다 알고 있거든 소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줄무늬 티셔츠를 좋아하던 아동이었다지 물감만을 바르지는 않겠어요 물의 속성으로 그대로 두세요 고운 색깔로 규정하기를 반복하는 소녀들 속에서 빠져나와 소녀는 과거로 노래한다 아빠가 죽고 엄마가 죽고 나는 죽지 않고 잘도 자라네 행복의 두 페이지는 죽음 상냥한 친구들도 거절할래 선물도 받지 않을래 기쁠 것도 없으니까 슬플 것도 없을 테지 가리고 있는 바람의 파티션 너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약한 소녀를 꺼내라소녀를 등장시키면 소년의 형태가 서서히 드러나는 법이미 절반의 소년 옆에서 느끼는 girl 돌보는 boy를 만드는 것은 girl의 진리숟가락 하나..

베로니카, 박채림

paradise
2016.11.10
우리는 애초에 하나의 몸이었다. 아니, 몸짓이었나? 나는 당신 손등에 잘못 그어진 흉터. 지난밤 꿈에 길게 칼자국 남긴 얼굴 가린 귀신. 당신의 잘 웃지 못하는 왼쪽 입꼬리. 저장도 안하는 참 못나온 쎌카. 당신이 태어날 때 처음 보고 놀란 그 환한 빛처럼, 나도 버튼이 잘못 눌린 복사기에 얼굴이 끼었을 때 태어났어요. 그 환한 빛 말이죠. 내가 어머! 하고 부끄럽게 비명을 질러보았는데요. 그 순간에도 나는 스무개, 서른개로 늘어나고 있더란 말이죠. 우리는 죽은 쥐들과 귀신 들린 인형과 벌레들이 우글대는 베개 등등, 캄캄한 지구에서 신나게 달리기를 하는 중이죠. 시든 꽃을 들고 제일 먼저 당신에게 도착하면 신나서 팔짝팔짝 뛰어올라요. 잘못 도착한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이네요. 누군가 우리를 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