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항, 유진목

paradise
2021.05.07

 

 

새벽에 배가 하나 있을 거야.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배야. 그걸 타고 조타실 바닥에 앉아 있으면 배의 주인이 와서 배를 띄울 거야. 네가 있는 것은 모른 척할 거야. 그건 나하고 얘기가 된 거니까 너는 없는 사람처럼 조타실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된다. 배는 내가 있는 곳에 도착할 거야.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배야. 너는 조타실 바닥에 앉아서 배가 출발하고 도착하길 기다리면 돼. 그러면 거기에 내가 있을 거야. 만약 내가 없다면 중간에 무언가 잘못된 거야. 그래도 괜찮아. 너는 도착할 거고 나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할 거야. 너는 배에서 내리면 돼. 바다가 끝나고 육지가 시작될 거야. 나는 있거나 없겠지만 너의 삶은 계속될 거야. 나는 잘못돼도 너의 삶은 계속될 거야. 두 발로 걸어서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돼. 거기서 사는 거야. 잊지 마. 새벽에 배가 하나 있을 거야. 너는 타거나 타지 않을 수 있어. 네가 타지 않아도 나는 거기에 있을 거야. 네가 없는 배가 오면 나는 거기에 있을 거야. 네가 없는 배와 함께 잠시 동안 거기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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